1. 퇴사했는데 왜 또 소속감을 찾고 있나요?
퇴사를 결심하신 분들은 분명 ‘자유’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반복되는 출근길, 상사의 눈치, 조직 내에서의 소모적인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으셨겠지요. 그런데 막상 퇴사를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새로운 커뮤니티를 찾고, 프리랜서 모임에 가입하고,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며 또 다른 '소속'을 원하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이러한 감정은 결코 개인의 나약함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어디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엔 반과 학교, 사회에 나오면 회사와 직책, 심지어는 결혼 후엔 배우자의 사회적 지위까지도 ‘내 정체성’의 일부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니 ‘소속 없음 = 정체성 없음’이라는 심리적 공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퇴사 이후 느껴지는 이 어색하고 불안한 감정은, 사실상 진짜 독립을 위한 첫 번째 고비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직 중심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왔기에, 그것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깊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2. 우리는 왜 '소속된 나'일 때만 안심할까요?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로 ‘소속의 욕구(Belongingness)’를 이야기합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서도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 다음 단계로 등장하지요. 누군가에게 속하고 있다는 감각은 생존 본능과도 연결되며, 현대 사회에서는 정신적 안정의 근간이 되곤 합니다.
퇴사 이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회사 ○○팀의 ○○입니다'라는 명함 한 장이 사실상 내 사회적 존재를 증명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제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아지고 투명해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 불안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소속이 있어야만 나다운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어떤 팀, 브랜드, 단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존재하고, 가치 있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지만, 진짜 ‘나’를 만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3. 퇴사 후 소속감을 대체하려는 흔한 패턴들
많은 분들이 퇴사 후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거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프리랜서 네트워킹 모임에 꾸준히 참여합니다. 이 과정은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때때로 우리는 소속을 갈구했던 과거의 습관을 다시 재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점검이 필요합니다.
특히 SNS에서의 브랜딩은 또 하나의 ‘가상 조직’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증명하기 위해 끝없는 콘텐츠를 만들고, 반응을 살피고, 때로는 비교 속에서 자존감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는 회사생활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퇴사자들이 '자유롭고 싶어서 퇴사했는데, 나는 왜 다시 어디에 기대려고 할까?'라는 질문을 마주하곤 합니다. 조직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소속 중심의 사고’ 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셈이지요. 이 모순을 인식하고, 반복되는 패턴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4. 소속 없이 살아보기: 정체성의 실험실
‘소속 없음’은 불안하지만, 때때로 해방감을 줍니다. 처음엔 내가 너무 투명한 존재처럼 느껴져 불안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 속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남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가장 효과적인 실험은 아주 소박한 것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만의 하루 일과표를 짜보는 것. 일주일 동안 아무 그룹에도 참여하지 않고 홀로 시간을 보내보는 것. 그 시간 동안 내 감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다이어리에 작성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또한 중요한 건, 타인에게 설명하지 않는 나를 견뎌내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늘 '요즘 뭐 해?'라는 질문을 받을 때,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다’고 말해야 안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 데도 속하지 않고 그냥 나로 살아보고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자립의 출발일 수 있습니다.
5. 소속이 아닌 연결을 선택하는 삶
우리는 반드시 소속되어야만 할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소속은 안정적이지만, 때론 나를 제한합니다. 반면 ‘연결’은 느슨하지만 유연합니다. 일시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고, 특정 관심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모였다 흩어질 수 있는 구조는 요즘 시대에 더 적합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퇴사 이후에는 이 ‘연결 중심’의 삶을 실험해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고, 원할 때 연결되고, 또 원할 때 거리 두기를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때로는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선택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소속되지 않아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직이라는 틀을 벗어났다고 해서 외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틀 밖에서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 마치며
퇴사 후에도 어디엔가 소속되고 싶어지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용기를 내보셔도 좋습니다. 누구에게 속하지 않아도, 나는 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홀로 설 수 있을 때, 진짜로 더 자유롭고 건강한 관계들이 시작됩니다.